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소포타미아 문명 (문단 편집) == 건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notjustanotherbook.com/ziggurat%20-%20babylon_ma.jpg|width=100%]]}}} || || '''{{{#E4C77E [[이슈타르의 문|{{{#E4C77E 이슈타르의 문}}}]]. 푸른 유약 벽돌이 눈에 띈다.}}}''' || 몇 천년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성상 메소포타미아의 건축이 이렇다 저렇다 딱 집어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세월동안에도 대략적인 특징과 건축 재료들은 나름 일관적인 면이 있기에, 이 문단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지은 건축물들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의 핵심 건축 재료는 진흙 벽돌이었다. 하지만 진흙 벽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었는데, 벽돌의 사이즈나 모양마저도 시대에 따라 천지차이였다. 고대 건축가들은 나무로 만든 틀에 진흙을 넣어 햇볕에 말린 다음 만들어진 진흙 벽돌을 사용했다. 초창기에는 예상 외로 둥글둥글한 모양의 벽돌을 선호했다고 한다. 둥근 모양의 벽돌들을 잘 엇물리게 쌓고 석회를 매끄럽게 발라주면 완공된 건물이 직육면체의 벽돌들보다도 더 내구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햇빛에 말린 진흙벽돌은 만드는 데 시간도 짧고 값도 거의 들지 않았지만 화덕이나 가마에 구워낸 벽돌에 비하면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햇빛에 말린 벽돌로 도시를 지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벽돌 건물들이 시간만 지나면 부스러지는 통에 일정한 주기마다 벽돌을 새로 갈아주거나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삭아진 벽돌 가루와 잔해들이 땅바닥에 쌓이며 도시의 지반이 인근 지반보다 점점더 높아졌다고 한다. 궁전이나 신전처럼 중요한 건물들은 일부러 가마에서 구워낸 벽돌이나 깎은 돌로 쌓거나, 아니면 테라코타 판넬을 겉면에 대어 풍화를 막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진흙에 불과한 벽돌이 삭는 걸 막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중동 지방의 고대 도시 유적에 가면 이 벽돌 건물들이 삭아내린 흙들이 쌓여 거대한 둔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고고학에서는 '텔'이라고 부른다. [[수메르]]인들은 도시설계라는 개념을 창안한 첫 번째 민족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우루크]]의 곧게 뻗은 다리와 거리, 성벽과 시장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수메르인 본인들도 난잡한 타민족들의 도시와 정갈한 자신들의 도시들을 비교하며 뿌듯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도시를 주거공간, 복합공간, 상업공간, 공공공간 등으로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구획은 당연히 신전과 궁전 등이 있는 공공 공간이었다. 신전 같은 공공 공간은 보통 도시의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지고 지대가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성장 자체가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신전이 도시보다도 더 오래된 경우가 잦았다. 도시 주변에는 거대한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성벽의 문들에는 각각의 독특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으며 문과 인접한 거리들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신성한 취급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바빌론]]의 [[이슈타르의 문]]과 '행진의 거리'. 도시 주변에는 당연히 그 많은 도시민들을 먹여살릴 거대한 농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농로와 수로들이 그 사이로 거미줄처럼 지나갔다. 이 농지들 가운데에는 드문드문 조그마한 마을들이 점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소마을들에서 수확한 곡물들을 도시로 운송해 들여오는 방식이었다. 거대한 수송로를 통해 도시로 들어오면 시장 등에서 필수품을 판매하는 식이었다. 참고로 수메르의 도시에는 보통 3단계의 도로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거대한 대로들. 개선식을 열거나 군대가 행진하는 가장 널찍하고 중요한 도로였으며 [[아카드어]]로는 '수쿠 리아니 에 사리(sūqu ilāni u šarri)'라고 불렀다. 두 번째가 대로에서 갈라진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거리들. 아카드어로 '수쿠 니시(sūqu nišī)'라고 했다. 마지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한 좁은 뒷골목으로 아카드어로는 '무수(mūṣû)'라고 불렀다. 대로들은 거의 한번 만들어지면 변하지 않았지만 뒷골목들은 건물을 다시 올릴때마다 이리저리 변하는 게 보통이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수메르의 도시는 대략 건물이 90%의 공간을, 도로가 10%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umblr_lw60ichAFq1ql5d2uo1_400.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482e72ccba27b13477dae65b1844001-ancient-mesopotamia-middle-east.jpg|height=300]]}}} || |||| '''{{{#E4C77E 일반적인 평민들의 가옥}}}''' |||| 왕과 고위 신관, 귀족들이야 번쩍번쩍한 궁전에서 호화롭게 살았다지만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들은 그만한 곳에서 살 재력이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흙과 흙벽돌, [[포플러]] 나무로 만들었다. 일반인들은 거실처럼 쓰는 하나의 큰 방에 여러 방들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의 가옥에서 살았다. 하지만 재력이 좀 되는 사람들은 중국의 [[사합원]]처럼 중간에 '타바수'라고 부르는 작은 뚫린 공간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로 방들을 지어 둘러쳤다.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하나였고 그 입구에도 집 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벽을 쌓거나 방을 하나 만들었다. 개인 사생활을 굉장히 중요시했기 때문. 수메르인들의 평균 가옥 면적은 90m^^2^^, 약 27평 수준이었다. 꼭 흙벽돌로 집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흔한 재료였던 [[갈대]]도 많이 썼다. 갈대 다발들을 단단히 묶어 땅에 박아 벽을 만들고 대충 살기도 했던 것이다. 나무, 자갈, 짚을 섞은 흙벽돌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잡재료들은 모조리 사용했다. 흙벽돌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에는 석회를 발라 매끄럽게 만든 다음 물감을 칠해 장식하기도 했다. 지붕은 야자나무 판자로 덮은 다음 갈대로 또다시 덮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문과 문틀은 보통 나무로 만들었으며 가끔씩 가죽을 대충 걸쳐놓고 문 대용으로 썼다. 집과 집 사이의 문은 너무나도 낮아서 통과하려면 몸을 한껏 수그려야 했다. 집바닥도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라면 그냥 기초만 다져놓은 흙바닥이라서 무너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최하층계급은 더 비참해서 그냥 갈대줄기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수준의 집에 살았으니 아무리 무너지기 쉽다지만 흙벽돌집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ruk-ur3-001-1.jpg|width=100%]]}}} || || '''{{{#E4C77E [[우르의 지구라트|{{{#E4C77E 우르의 지구라트}}}]] 복원도.}}}''' || 가난한 인간들은 힘들게 살았지만 반대로 왕과 고위층은 정말 호화롭게 살았다. 궁전과 신전들은 유약을 바른 벽돌로 장식에 태양이 비칠 때마다 빛났고 안도 널찍했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 '''[[지구라트]]'''가 이 신전에 속한다. 총 32개의 지구라트가 남아있는데,[* [[이라크]]에 28개, [[이란]]에 4개가 남아있다.] 기원전 4천년 우바이드 문화권 시절부터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후 급격히 발전하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피라미드]] 구조로 쌓았으며 안은 말린 벽돌, 외면은 유약 바른 색색의 벽돌로 쌓았다. 층수는 2단에서 7단까지 다양했고 가장 위에는 사당이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도 어찌나 압도적일 정도로 화려했던지 당시로서는 촌구석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에테멘앙키]]를 보고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바벨탑]]의 전설을 생각할 정도였다. 현존하는 지구라트 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우르의 지구라트]]인데, 총 7단의 지구라트였지만 남아있는 건 3단 밖에 없다. 지구라트를 제외한 사원들도 많았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을 때 자신들만의 [[우주론]]을 넣어 만들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이 땅은 거대한 짠물 바다 위에 떠있고, 이 땅과 짠물 바다는 '아프수'라고 부르는 더 거대한 민물 바다 위에 떠있으며 그 위를 거대한 반구가 덮고 있는 형태라고 한다. 땅-짠물 바다-민물 바다로 이어지는 3단의 구성이라 지구라트나 신전도 3단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세계에서 흘러내리는 4개의 강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네 모서리를 가진 직육면체 모양으로 건물을 쌓았고, 바다에서 떠오른 태초의 땅 '두쿠그'를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지반을 약간 높여서 지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pologia21.files.wordpress.com/babilonia-y-zigurat.jpg|width=100%]]}}} || || '''{{{#E4C77E 바빌론의 지구라트 [[에테멘앙키|{{{#E4C77E 에테멘앙키}}}]]를 3D로 재현한 모습.}}}''' || 사원들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신전 건물의 긴 장축은 신들을 위한 입구, 그리고 짧은 단축은 인간들을 위한 입구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신들을 위한 입구가 정면이었던터라 사람들이 들어갈 때에는 측면 입구를 통해서 들어가 90도 돌아 신상을 경배해야 했다. 신전 최중심부에 있는 신상은 황금이나 각종 값비싼 장신구들로 가득 싸고 있어서 매우 호화로웠다. 이따금 축제 시기가 되면 정기적으로 신전에서 꺼내나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세계를 감싸는 거대한 바다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분수]]도 있었다. 심지어 기원전 3천년 경에 이미 최초의 분수가 만들어졌다고. 주변의 운하에서 물을 끌어와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 건축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될 정도로 위대한 건축물이었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향수병을 앓는 아내 아미티스 왕비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길이가 각 방향으로 123m,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지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였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 극장을 연상시켰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의하면 총 7층, 꼭대기 층은 바빌론 성벽보다도 20m가 더 높았으며 각 층에는 테라스를 설치해 테라스에 흙을 덮은 다음 온갖 나무와 과실수를 심었다. 각 테라스는 돌기둥으로 된 통로로 이어져 있었으며, 공중 정원 내부에는 방 100여 개가 있고 내부 한가운데에는 크기가 엄청난 광장이 있었으며, 이 광장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방수를 위해 두꺼운 납판 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두꺼운 갈대를 놓고 그 위에 다시 구운 벽돌과 석회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야말로 고대인들이 생각하던 [[천국]]의 이미지를 지상에 그대로 재현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원후 1세기 경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대에는 그 터와 유구만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 성경 속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에테멘앙키]]도 있다. [[마르두크]] 신을 모시는 95m x 95m의 거대한 규모의 지구라트로, 그 높이가 90m를 넘는,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크고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지구라트의 건설 목적도 조금이라도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왕이나 신관들이 보다 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가로와 세로 30 cm, 높이 8 cm의 구운 흙 벽돌 최대 7,500만 개를 사용했다고 추정되며 특히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은 당대 최고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로 둘렀고, 신전 곳곳에 푸른 자기 벽돌을 활용해 [[울트라마린]]을 입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